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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타이틀 정치 / 상세보기
추천수 0 | 조회수 292 | 등록일 2019-07-16 21: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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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태초

제목

태국 총선 갈등의 본질
내용
 



 
                             태국 총선 갈등의 본질
 
 
 

히이즈미 가쓰오(아이치현립대학 명예교수) 

출처:http://wedge.ismedia.jp/articles/-/15368?page=4
 


2019년 2월 8일 탁신계의 국가 유지 당이 왓치라롱컨 국왕의 누나인 우본랏 공주의 총리 후보 추대를 갑자기 내놓은 점에서 총선을 앞둔 태국정치 정세는 갑작스럽게 변할듯 했다.이날 심야에 공주 옹립은 부적절하다는 국왕성명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진정되는 듯 보이지만 그 직후부터 방콕에서는 쿠데타설이 나돌고 있는 등 공주 옹립극의 여파가 당분간 진정될 것 같지 않다.아니, 태국 정치의 차후에 미묘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조차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AFP/아프러


 지금까지 되풀이되어 왔다. '쿠데타' ⇒ 국회 정지·헌법 폐지 ⇒ 입법 의회 ⇒ 잠정헌법 신헌법발포 ⇒ 총선 ⇒ 민정 이관)이라는 사이클에 따른다면 쿠데타에서 1년 안팎의 군정 이후 총선을 거치면서 민정 이관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던 만큼 이번처럼 5년에 가까운 잠정 기간은 확실히 이례적이라고 말할정도로 장기적이다.

 그러나 공주 옹립 극을 제외한다면 총선을 앞둔 군정 당국, 사실상 군정 연장을 지지하는 정당, 군정에 반대하는 정당, 이들 3자의 움직임은 기본적으로는 "기시감(한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선가 이미 경험한 것 같은 느낌)"에 넘친 것이다.

 하지만 2014년 쿠데타에 미치게 된 사회의 움직임, 잠정 기간이 이렇게도 장기화된 배경을 감안하면 정치 사이클이 앞으로도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지 않다.역시 이번 총선은 우리 언론의 상투적인 군정연장이냐 민주화냐 민주주의 후퇴니 하는 식의 정서적 시각에서 찾을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국왕을 원수로 하는 민주주의


 198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40년 남짓 사이 태국어로 "패티 와트(혁명)"로 불리는 쿠데타는 5회(1981년 85년 91년 2006년 14년)에 이르고 있다.단순 계산으로 약 8년당 1회의 빈도가 되지만 모두" 현 정권에 의해서 노출된 위기를 안정시키기위해 『 국왕을 원수로 규정하는 민주주의 』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5차례 쿠데타 중 80년대 2번은 실패하고 1991년 2006년 2014년 3번은 성공했다"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승패의 분기점은 궐기세력의 군부 안밖의 영향력도 그렇지만, 역시 왕국으로서의 태국의 근간인 "국왕을 원수로 하는 민주주의"의 최종적 근거인 국왕이 "결기의 취지"를 "승락"했는지 아닌지에 있었던 것 같다.

 1981년과 85년 2차례 쿠데타를 주저앉히는 것으로 프렘 정권(당시)은 "국왕을 원수로 규정하는 민주주의"를 현실 정치에 충실히 반영시키고 8년에 걸친 장기 집권을 유지하는 사회의 장기 안정을 가져왔다.사회의 안정이 외자를 이끌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고도 경제 성장에 이어지고 있다.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성장이 기존의 정치문화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1991년 차 챠ー이 정권, 2006년 탁신, 2016년의 잉락 정권 ― ― 쿠데타로 추방된 정권의 정치 자세의 공통 분모를 굳이 말하자면 경제 건설의 효율화를 위한 사회 구조 개혁이고 경제 발전으로 유권자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과거 침묵하던 유권자가  드디어 말을 하게 된 것이다.한 표의 힘에 눈을 떴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그 것이 이전부터 태국사회의 근간을 주도한 상층 사회에 위기감을 가져 온 것이다.

 일찍이 태국 정치학자의 한 명은, 상층사회를 ABCM 복합체로 표현했다. A(왕실)·B(관료)·C(재벌)·M(군부)이다.말하자면 ABCM 복합체야말로 '국왕을 원수로 하는 민주주의'를 뒷받침해 온 것이다.

 이상을 바꾼다면"국왕을 원수로 규정하는 민주주의"에 저촉될 수 있었기에 차 챠ー이, 탁신, 잉락 3명의 총리는 정권을 잃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국왕을 원수로 하는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반대인가.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모르지만 감히 말한다면, 2014년에 성립한 이후 프라윳 과도 정부에서 경제 정책 사령탑을 맡솜킷토 부총리의 행동이 "국왕을 원수로 규정하는 민주주의"의 하에서도 경제 발전이 가능함을 보이는 듯 싶다.양자가 꼭 상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덧붙여서  맡솜킷  부총리는, 챠이 정권에서 수상의 사적 브레인( "핏사눌록 저택 그룹")의 핵심으로서 경제 정책에 민간 활력을 대담하게 도입해, 탁신 정권에서는 "탁시노믹스"라고 불리는 태국 경제 정책의 책정·추진자이기도 했다.이 정책이 가져온 경제 성장에 따르고 탁신 총리에 대해서 안팎에서 높은 평가가 태어난 것은 이미 알려졌지만, 실은 2006년 쿠데타로 출범한 송티 과도 정부에서도 솜킷의 경제 정책으로부터  빼낸 것이 있다.



수상 선임 시스템


 국왕이 쿠데타를 재가하는 순간 쿠데타에 결의한 군인집단에는 정식 국권의 전권이 부여되고 그 밑에 과도정부가 조직된다.쿠데타라는 군사행동에 호소한 비합법 군인집단이 합법적 국가기관으로 변질되는 셈이다.

 2014년의 쿠데타를 예로 들면, 푸미폰 국왕이 재가한 단계에서 당시 프라윳 육군 사령관을 수장으로 하는 쿠데타 세력은 "NPKC(국가 안보 위원회)"으로 국정의 최고 기관인 지위를 획득했다.현재의 프라윳이 임시 정권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국권의 최고 권력 기구인 NPKC이다.다시 말해 프라윳 임시총리의 권력 원천은 자신이 맡고 있는 NPKC 의장직을 말한다.여기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총선을 거치면서 민정 이관이 이뤄지고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NKPC는 권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쿠데타 성공에서 민정 이관까지의 기간 최대의 정치 과제는 새 헌법 제정이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총리의 취임 요건과 수반 지명권이다.

 국회에 의석을 갖지 않고도 총리 취임이 가능하다면 현역 군인이 제복 상태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헌법이 군정을 보장하게 되지만 역시 국왕을 원수로 하는 민주주의에는 저촉될 것이다.그래서 총리는 총선을 거친 하원의원이어야 할까.비하원 의원이라도 취임을 가능케 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원의원에 국한될 경우 군인의 수상 취임은 극히 어려워진다. 군부지도자는 술수가 난무한 선거를 잘 못하기 때문이다. 속임수가 뛰어난 정치가들에게  군복을 막 벗은 전직 군인 정치인의 영향력을 죽이는 것은 아기들의 손을 비트는 수준의 정도로 수월하기 때문이다.사실, 옷을 벗고 총리가 된 3명의 육군 대장 ― ― 크리앙삿크(1977년~80년), 스칭다ー(1992년), 챠와릿(1996년~97년)― ―은 함께 기대에 어긋난 형태로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당·정치가가 순진한 군인들의 발밑을 떠밀어 버렸기 때문이다.

 남는 중요 과제가 국회 구성이다.태국에서는 정권의 명운을 좌우하는 수반 지명, 예산 결의와 내각 불신임 결의의 3건은 상원(칙선.)과 하원(총선 정당)의 양원 합동 의회에서 결정된다.일반적으로는 상하 양원은 2:3의석비율로 구성되어 왔다.칙선. 그렇다고 상원 의원은 쿠데타를 성공시킨 군정 당국이 선임을 맡기에서 군복을 벗은 군부 간부는 하원 3분의 1정도의 지지를 모으면 총리가 되면서 안정적 정권 운영이 가능하다.

 2017년 4월에 공포·시행된 현행 헌법을 예로 본다면 상원 250명, 하원 500명으로 구성된다.상원 의원은 칙선. 하지만 250명 중 50명은 중앙 선관위가 200명은 NPKC가 선임한다. 선관위도 NPKC 하위조직이므로 250명이 NKPC의 뜻에 거스르는 투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생각하기는 어렵다.

 한편 하원의 500석은 소 선거구 선출 350석과 비례 대표 150석으로 나뉜다.현행 헌법과 선거법에 따른 비례 의석은 소선거구 정당의 획득표수에 단순하게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소선거구에서의 승리는 반드시 하원에서의 승리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군정 당국은 총선 후 국회에서 이미 손아귀에 넣고 있는 250표의 기초 표에다 하원에서 130표 가량을 모으면 상하 양원 합동 의회의 과반수를 꺾고 프라윳 임시 수상을 민정 이관 후의 새로운 총리로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탁신 계열의 태국 공헌당이 유리한 선거전을 전개하는 하원 과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상원 250석이 장애로 작용하고 집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한편 일찌감치 프라윳 과도 총리 지지를 내놓은 국민 국가의 힘당(군정 당국의 위장 정당)에 있어서의 목표는 130석이 넘는,"승리의 벽"은 그리 비싼 값을 치를 것 같지 않다..


태국 정당의 특성


 총선을 거치면서 군정당국의 의도대로 프라윳 총리가 탄생했다고 해서 안정적인 정권 운영이 약속된 것은 아니다.그 배경에는 태국정당의 특성이 있다.

 2월 11일 중앙 선관위에서 이번 총선에 36정당이 참여하는 것이 밝혀졌지만 태국 공헌당, 민주당, 국민 국가의 힘당 국가 유지 당, 민족 발전당 새 미래당 국가 발전당, 태국 공민당, 신민당, 신경제당 시암 개발당 태국 민주 사회당 등 주요 정당의 정당 이름으로도 정당의 정치적 신조와 정책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정당의 이름에서 나타난 각당의 정치적 신조와 정책은 색이 바랬고, '어쩌다 정권을 잡을 수만 있다면' 식으로 정권쟁취를 최대 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태국정당의 제1의 특성이다.그렇게 해서 타이 공헌당은 탁신 전 수상의 오른팔이었던 스다랏 여사를, 국민 국가의 역당은 프라윳 잠정 수상을, 민주당은 당수의 아피싯 전 총리를 수상 후보로 내걸어 선거전을 싸우게 된다.국가유지당이 우본랏 공주를 총리 후보로 내세운 것도 그래서다.

 제2의 특성은 기본적으로는 지역 정당의 성격이 강한 전국 정당에까지 확대하기 어렵다.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주당은 태국남부와 방콕 인텔리층 지지는 있지만, 태국동부, 북부에서 그 세력이 미미하다. 말하자면 하원에서의 단독 과반수 획득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연립정권이 될 수밖에 없지만, 당연히 각료 자리 배분을 둘러싸고 연립여당 내 쟁탈전이 벌어져 소수의 자리를 배정받은 정당들은 불만을 갖게 된다. 이 경우  총리는 강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어 연립정부의 불안정을 불러일으킨다.안정적 정권 운영은 쉽지 않다.1990년대에 정권 교체가 연속된 것도 여기에 큰 요인이 있었다.

 그럼, 왜 탁신(2001년~06년), 잉럭 정권(2011년~14년)에서는 단독 정권이 가능했을까.탁신 진영이 풍부한 자금력을 배경으로 중소 정당을 규합해 전국 정당의 모양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당시 헌법에서는 총리가 하원 의석을 갖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를 제외한다면 총선 승패가 집권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빨간셔츠 대 노란셔츠

 총선을 반복하면 유일한 전국 정당인 탁신계 정당이 과반수를 장악해 버린다.헌법에 의하면 상원은 정권 운영에 간섭할 수 없다.당연히 기득권층-ABCM 복합체의 불만이 쌓이게 된다.

 중국에서 발생한 천안문 사태의 소형 판이다. "5월 사건"이 1992년 5월에 방콕의 관가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유혈 참사를 일으킨 책임을 진 군부는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후퇴시켰다.이 사건을 계기로 "인민에 의한 헌법 기초"을 내세웠던 헌법 기초 위원회가 출범하면서 97년 10월에는 "가장 민주적 내용을 가진다"과 안팎에서 평가된 "불기 2540(1997년 태국 왕국 헌법"이 제정되고 있다.

 이 헌법 하에서 총선을 실시한 결과 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야당 세력과 민주파로부터 "반 국왕 국가 권력의 독점과 남용, 투명성과 윤리를 잃은 정권 운영"등으로 비판된 탁신(2001년~06년)이 탄생한다.탁신 총리가 유일한 전국 정당을 억제하는 하원 과반을 차지했던 셈인데, 그가 2006년 쿠데타를 부르고 마침내 국군의 정치적 영향력 회복을 초래했다. 민주화 헌법이 문민이지만 1당에 의한 유일정권을 만들어내고 그 정권을 쓰러뜨리기 위한 방법은 총선이 아닌 군부쿠데타 밖에 없다.민주주의에 대한 빈정거림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정거리는 현상이다.

"불력 2540(1997년) 태국 왕국 헌법"이 탁신 독재 정권을 낳아 버렸다는 판단 때문이다.

(1)국민의 권리와 자유의 보호
(2)권력 집중의 시정과 권력 남용 방지
(3)정치의 투명성·도덕과 윤리의 확보
(4)권력 체크 기관에 대한 권능을 부여 

― ―을 담은 "불기 2550(2007년 태국 왕국 헌법"이 2007년 8월에 제정되었다.

 이 헌법 아래서 총선을 반복하지만 역시 탁신 지지 정당이 하원 과반수를 장악해 정권을 유지한다.거기서 상기(1)(2)(3)(4)의 기능을 주어진 헌법 재판소, 국가 옴부즈맨, 그리고 국가 부패 방지 관리 위원회가 헌법에 규정되고 이들 기관에 의해서 총리 해직(2008년), 총 선거 무효(2014년)가 선언되었다.하지만 탁신 지지 정당이 약화하는 것도 아니다.

총선거를 반복해도 탁신 지지 정당은 무너뜨릴 수 없다는 판단하에, 민주당을 선두로 하는 반 탁신파는 국왕 지지를 의미하는 노란색 셔츠를 두르고 방콕 거리를 누볐다.한편 탁신 지지파는 빨간색 셔츠를 입고 반대 행동을 전개했다."국왕을 원수로 하는 민주주의"를 내걸어 총선거에 의지하지 않고 잉락 정권(탁신계 정권) 타도를 호소했다.이 행동이 결과적으로 2014년의 잉락 정권 타도의 쿠데타를 부르게 된다.

 노란셔츠 대 빨간색 셔츠파의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당시 노란셔츠를 구성하는 것은 국왕제 지지를 강하게 옹호하는 도시의 민주당 지지층이 중심이었고, 빨간색 셔츠파는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동북부 농민층이 중심이어서 국왕제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일부에는 공화제를 지향하는 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비판적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또한 민주파 대 금권파, 도시 대 농촌, 인텔리층 대 농민층의 대립등과 같이 획일적·단락적으로 보도되기 쉽기는 하지만, 변화하는 태국 사회의 실상에 비추어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색채에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은 아니다.

 역시 1980년대 말부터 태국 사회의 변질을 전제로 두지 않는 한 노란색- 빨간색 갈등의 본질은 설명하기 어렵다. 경제성장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화가 유권자의 정치 의식의 변화를 촉진하고, 이전부터 태국 사회를 지지해 온 ABCM 복합체의 사회적 기반이 동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노란색, 빨간색 대립의 본질은 국민이 향후 나라의 장래를 ABCM 복합체에 맡기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새로운 새력에 맡겨야 하는지로  수렴하게 될 것이다.굳이 도식화한다면 노란셔츠파는 앞으로도 ABCM 복합체를 신임하고 빨간셔츠파는 부정적이라는 말이 될까.여기서 주시해야 할 것은 탁신 전 총리라는 존재이다.지금 탁신은 "반 ABCM 복합체"라고 하는 기호로 변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길모퉁이 들어간 국왕 원수 민주주의

 쿠데타가 여러 차례 반복될 때마다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고 총선도 치러져 왔다.이것이 2006년 이후 태국 정치이긴 하지만 2019년 총선에 나타난 민의를 솔직하게 판단하면 반 탁신 세력의 열세를 부정할 수 없다.새 헌법 제정이나 관련 법규 개정 등을 거듭함으로써 법적으로 빨간색 셔츠파의 신장을 막으려 했으나 역시 유권자의 투표 행태에서 빨간색 셔츠파가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2005년 봄 이후 국정을 도식화하면《총선 빨간색 셔츠파 승리와 정권 장악 노란색 셔츠 반대운동 ⇒ 국내 혼란 ⇒ 쿠데타 군정 ⇒ 새 헌법 제정 ⇒ 총선 ⇒ 빨간색 셔츠파의 승리와 정권 장악이라는 정치 과정이 된다.역시 태국은 ' 불모의 사이클(아무런 발전이나 결실이 없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을 반복해 온 것 같다.여기서부터, ABCM 복합체를 정점으로 하는 가득권층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읽어낼 수 없을까.

 되돌아보면 1973년"학생 혁명"으로 위기에 빠진 태국을 혼란에서 구한 것은 푸미폰 국왕(당시)의 판단이었다.이후 전 국왕은 서거하는 2017년 가을까지 거듭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역대 헌법이 내세우는 "국왕을 원수로 규정하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민의 일체화를 실현했다.

 5월 초와 정한 대관식을 거쳐서 왕국으로서의 태국의 새로운 왕제를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왓치롱컨 현 국왕은 전 국왕이 체현한 '국왕을 원수로 하는 민주주의'를 답습할 것인가.과연 새로운 형태의 국왕을 원수로 하는 민주주의로 향해 나아갈 것인가.3월 24일 총선과 뒤이은 새 정권 성립까지 움직임이 새 국왕 아래의 새로운 왕국의 방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새로운 국왕하에서의 첫 총선은 그동안의 노란색대 빨간색 대립항쟁의 혼란 속에서 반복된 총선과는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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